Kangam Song Seong-yong
생애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은 1913년 7월 9일 전북 김제군 백산면 요교마을에서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 1882~1956)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99년 2월 8일 전주시 교동(校洞)의 고택 아석재(我石齋)에서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칠 때까지 학예를 통해 세상과 소통했다.
5세부터 15세까지, 부친으로부터 전통 유학, 성리학, 그리고 서예를 배웠고, 시문(詩文)과 서예 5체에 골고루 능했다. 청년기 이후 서예에 더욱 매진하여 중국으로부터는 왕희지, 구양순, 안진경, 저수량, 동기창, 미불, 황정견, 하소기, 등석여, 오양지, 오창석, 정섭, 우우임의 서법을 두루 학습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신위, 김정희, 김용진, 김진우, 손재형 등의 서예를 두루 수용하여 각 서체의 묘리를 융합함으로써 그만의 고유한 강암체를 이루었다.
강암 선생님은 선친의 가르침에 따라 민족의식이 강하셨다.
일제의 단발령에 항거하여 명성과 보명을 지키고 한복을 고수하였으며, 현대 개혁을 거부하셨다. 일본어를 멀리하고 우리의 문자인 한글을 익혔으며, 자립하여야 할 우리의 전통문화와 유학의 도를 철저히 지키며 일본문화는 의도적으로 배척하셨다.
서력 – 작품활동 :
- 강암선생은 일찍이 구양순, 미원장, 동기창, 황산곡, 유석암, 하소기, 추사 등 중국과 한국서예대가의 5書體를 두루 섭렵하고, 선친 유재 송기면과, 영운 김용진, 일주 김진우 로부터 문인화를 익혔으며, 法古創新 의 서예로 고법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적 조형미를 갖춘 독창적인 “剛菴體”를 확립하였다. 서예5체(篆 . 隸 . 楷 . 行 . 草)는 문론 문인화(梅 . 蘭 .菊 . 竹 과 松 . 蓮 . 牧丹. 芭蕉)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두루능숙하여 한국서예계의 중흥발전에 크게 기여 하였습니다. 특히 문인화의 風竹은 강암선생의 강직한 성품을 예술로 승화시킨 독보적인 작품으로 평가되어 오늘날 만인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 강암선생의 작품은 호남을 비롯한 경향각지에 비문. 현판등 수천여점이 산재해 있는바 , 그 중에서도 호남제일문. 내장산내장사. 토함산석굴암. 두륜산대둔사. 불국사자하문. 불국사불국선원. 원각성존소태산대종사비명. 연지문. 금산사보제루. 백양사화엄전. 화엄사적멸당. 금오산향일암.동춘송선생유허비.신도비 등의 대필은 강암선생의 웅혼한 기상을 그대로 말해준다 하겠습니다.
- 국전초대작가로, 대한민국미술대전,전라북도 미술대전, 동아미술대전 등을 비롯한 국내 여러 서예대전 심사위원과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선정위원으로 참여하여 한국서예발전에 크게 기여 하였습니다.
- 선생은 일찍이 1967년도에 서화연구단체인 “강암연묵회”를 만들어 후학지도와 인재양성에 힘썼으며, 연묵회 는 강암선생 작고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으로 2008년까지 연 40회의 회원 작품전을 개최 하였으며,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 질것입니다.
- 한. 중. 일서예가교류전, 한.일문화교류전, 중화민국역사박물관초대전, 6회에 걸친 한중이문연의전 의 개최로 서예술 의 국제교류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 1995년도에 동아일보사가 주최하여 마련한「강암송성용회고전」의 대주제는 “剛菴은 歷史다” 입니다. 이는 언론이 이 함축된 표현을 빌러 후학들로 하여금 살아있는 노대가의 생애와 예술을 되돌아보게 하는 자리였습니다.
- 1998년도 광주시문화상(의재미술상) 수상 기념으로 1999녀 10월에 광주시립미술관에서 “강암송성용선생유묵전”을 개최하여 돌아가신 선생님의 유덕과 예술 혼을 기리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사회활동 및 수상경력 :

- 한편으로 강암선생은 유도회 전라북도위원장, 간재사상연구회장을 역임하여 유학발전에도 크게 힘 쓰셨으며, 문교부장관상, 전라북도문화상, 전주시민의장, 월남이상재선생찬하장, 대한민국문화훈장, 광주의재미술상 등을 수상 하였습니다.
- 선생은 무엇보다 사재로 1995년도에 강암고택옆에「강암서예관」을 세워 강암선생 작품과 국내외 유명작가의 작품 등 1,162점을 전주시에 기부하여 국내초유의 서예전문전시관을 개관 하였습니다.
- 또한 1993년도에는 재단법인 강암서예학술재단을 만들어 서예의 학술적 연구와 장학사업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현재 계속사업으로 시행중인 사업은 – 강암서예대전개최 -강암서예장학금지급 – 강암서예학당운영 – 동양예술논총발간 – 강암서예소식지발행, – 강암묵적발간, – 강암유고집 발간 등입니다.
- 이는 모두 선생께서 평생에 개인의 예술과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여 우리모두 공유하자는 간절한 뜻이 담겨져 있는 사업들입니다.
저서
선생의 저서로는- 도서출판不二에서 출간한 「강암천자문서」「강암성용서집」「강암묵적(서.화)」「강암묵적(비문.현판)」「강암유고」있습니다.
– 강암천자문서
– 강암송성용서집
– 강암묵적(서.화)
– 강암묵적(비문. 현판)
– 강암유고
가족사항

강암송성용:1913년 7월 9일생. 1999년 2월 8일 서거
※묘지-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이성리 산50-1
부인 이도남:1914년 8월 24일생. 2001년 12월 6일 서거
※묘지-강암묘소옆
자녀: 4남2녀
-장녀: 송복순(농업).
-장남: 송하철(전 전주시장, 전 전라북도부지사).
-차남: 송하경(전 성균관대교수, 국전초대작가)
-삼남: 송하춘(전 고려대 교수, 소설가)
-이녀: 송현숙(국전초대작가, 이당서실운영)
-사남: 송하진( 전 민선 전주시장, 전 전라북도지사)
강암선생 서비
서비사진 전면

서비사진 후면

- 위치 : 전북특별자치도 검산동 김제문화체육공원내 잔듸광장
- 제막 : 2003년 6월 14일
- 서비 : 건립 취지(김제시장)
「예로부터 우리고장 김제는 호남의 龜山인 母岳山 자락에 자리하고 광활한 金萬平野의 풍요로움이 함께 어루러진 복된 고장으로, 멋과 예술을 사랑하는 藝鄉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書藝에 있어서 우리 김제는 湖南은 물론 大韓民國의 書藝界를 주도 하였습니다. 조선조 중기의 宋 宋日中으로 부터 石亭 李定规、裕 宋基冕, 그리고 彫 宋成에 이르기까지 300여 년간 한국 서예계 를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특히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감제 서예의 역사는 剛菴를 선생으로 인하여 빛이 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길이길이 후세에 전승될 것입니다.
강암 선생은 김제시 백산면 요교마을에서 태어나 일찍이 儒家의 전통을 이어받아 한학과 서예를 익히셨으며, 완성한 서예창작활동으로 독창적인 剛菴書體을 확립하여 韓國書藝史의 새로운 찾을 열었습니다.
日帝의 斷髮令에 항거하여 保髮과 韓服을 고집하고, 創氏改名을 거부하는 등 艱難했던 시대의 겨래 얼 과 民族魂을 지켜내셨으며, 평생 동안 모은 서예작품과 사유재산을 내놓아 국내 초유의 서예전문 전시관인 書藝館을 세우고, 電書藝學術財團을 만들어 서예의 학술적 연구와 후진양성 그리고 장학사업을 실시하는 등 예술의 사회 환원을 몸소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강암 선생의 고매하신 인품과 학문과 서예술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師表가 되고 있습니다.
강암 선생 탄신 90주기를 맞이하여, 선생님의 높으신 人格과 學德과 藝術을 함께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김제시민의 뜻을 모아 母岳의 三角筆鋒이 마주 보이는 이곳에 書碑를를 세웁니다.
2003년 6월 김제시장 곽인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