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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전북도민일보 20120212] 최초 강암체 창시자 강암 송성용

작성자
강암서예관
작성일
2012-02-12 18:58
조회
507
출처 : https://www.do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27686

­(34) 최초 강암체(서예) 창시자 - 故 강암 송성용 선생

“호랑이나 표범의 용맹함으로도 사람에 의해 사로잡히는 바가 되는데 내가 무슨 믿을만한 세력이 있겠는가. 온순하고 공손하며 스스로 늘 겸허하여 다른 사람의 시기를 사지 않아야만 이 시대에 나의 생명을 잘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서예란 사람됨을 나타내는 예술이다. 비록 정확한 서법과 운필은 수련을 통해 얻어질 수 있으나 글씨에서 풍기는 높은 운치만큼은 마음의 단련에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예는 기법에 인품이 더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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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선생(1913∼1999)은 뛰어난 기법과 고아한 인품으로 한국서예의 독자적 경지를 이룬 대서예가이자 대유학자다. 그는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 근본이 서야 방법이 생긴다)’과 ‘온공자허(溫恭自虛, 온순하고 공경하며 스스로 늘 부족한 듯이 사는 삶)’를 좌우명으로 삼고, 오롯이 화선지와 붓, 그리고 먹과 책만을 벗하며 꼿꼿한 선비정신을 지켜왔다. 한평생을 올곧은 정신과 격조, 단아한 품격으로 살며 강직한 성품을 예술로 승화시킨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이자 한국 서단의 거목(巨木)인 것이다.
강암 선생은 1913년 7월 9일 김제군 백산면 상정리 요교마을에서 호남의 대유학자였던 유재 송기면 선생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선친인 유재 선생은 간재 전우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한 유학자이자 민족주의자. 강암 선생은 부친을 통해 자연스럽게 높은 학문과 선비로서의 기개를 배우며 자랐다. 또한 열여섯이 되던 해에는 전북 완주 출신의 유학자 고재 이병은 선생의 셋째딸 이도남 여사와 결혼을 했는데, 이때부터 장인 고재 선생으로부터 학문과 서도를 사사하며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격조 높은 서도의 경지를 구축해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스물다섯이 되던 해부터는 사군자에 몰두, 당대의 문인화가로 꼽혔던 김용진 선생에게서 사군자의 필법을 받는가 하면 김진우 선생으로부터 서죽법 강론을 듣는 등 서예에 대한 아낌없는 애정을 쏟으며 서예공부에 전념했다.

그가 작품 창작에 있어 전, 예, 해, 행, 초 5체는 물론이고 대나무, 난초, 매화, 국화, 소나무, 파초, 괴석 등 다양한 소재의 문인화를 다 잘 그린 이유도 이 같은 남다른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뛰어난 기법에 인문학적 소양까지 갖춘 강암 선생은 1956년에서야 뒤늦게 대한민국 제5회 미술전람회에 행서와 묵죽을 출품, 입선하며 서단에 유명서예가로 등장했다. 이후 44세부터 54세까지 여러 국전에 참여, 독보적인 실력으로 한국 서단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글씨면 글씨, 그림이면 그림 모두 다 청아한 서권기와 문자향으로 충만해있던 시기였다.

이윽고 국전 출품활동을 마친 그는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하면서 역대의 명가들로부터 섭취한 자양분을 융합시켜 특유의 서체를 개발했다. 바로 구체신용사상(구체신용사상)을 펼쳐 전통서예에 근대서예의 독특한 서풍을 접목시킨 ‘강암체(剛岩體)’를 일궈낸 것이다. 강암 선생만의 독자적인 서체인 ‘강암체’는 구양순 해서에서 필력을 얻어 골기가 강하며, 한학공부가 깊었던 연유로 글씨 속에 문기(文氣)가 가득하다는 게 특징이다. 또, 자유로움과 유려함, 그리고 중후함과 세련미가 용해돼 있다는 평이다.

이후로 그는 줄곧 서예와 유학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정진했다. 서예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말년에는 그동안 모은 재산 6억원을 기부, 서예를 학술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흥·보존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강암서예학술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팔십평생 동안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서예를 연마하고 유학을 공부하며 오롯이 서예의 외길을 걸어온 20세기 선비였던 것이다.

특히나 그는 수분으로 초지일관하며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을 몸으로 실천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김병기(전북대학교 교수) 서예평론가는 “선생님은 평생을 자연에 순응하며 맑고 깨끗하게 살아왔다. 부귀와 영화와 편리함을 탐할 일이 없으니 남에게 청탁을 하거나 신세를 져야할 일이 없었다”며 “그저 자신의 삶을 자신의 노력으로 영위하며 근면하고 소박하게 살고 맑은 정신으로 늘 청수한 작품을 창작할 것을 꿈꾸었다. 청탁할 일도 없고 신세도 질 일도 없으니 언제 어디서나 떳떳할 수밖에 없는 게 강암 선생이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강암 선생은 한국 서예계의 새로운 장을 연 대서예가이도 하지만 민족의 혼과 정신을 지켜온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선친 유재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는 일제에 항거해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지켰으며,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일본어를 멀리하는 대신 우리의 문자인 한글을 익혔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켜나가야 할 우리의 전통문화와 유가의 도를 철저히 보존·계승해온 것이다.

강암서예학술재단 송하철 이사장은 “아버지는 잘못된 세상에 대해서도 강하셨다. 일제의 탄압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올바르지 않게 변해가는 세태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의지도 강했다.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평생을 보발하고 한복차림을 고집하며 전통과 민족정신을 지켰다”고 회고했다.

부침하는 세태의 유행이 본질을 호도하거나 홀시해 우리문화와 정신의 뿌리가 흔들리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이 같은 철학을 바탕으로 강암 선생은 두발, 의상, 식생활, 대인관계, 사회생활 등을 처음에 마음먹고 다짐한 그대로 즉 초지일관으로 실천하며 살았다. 오늘날 그가 더욱 존경을 받는 이유도 흔들림 없는 올곧은 정신과 철학으로 서예술의 본질을 추구했기 때문은 아닐까.

‘서예는 곧 그 사람이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 강암 선생의 작품은 유독 깊은 예와 멋을 지니고 있다. 격조 높은 인품으로 최고 경지의 예술을 창작한 이 시대의 진정한 선비이자 위대한 서예가 강암 송성용 선생. 지난날 그가 걸어온 발자취는 영원히 전라북도의 역사와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고(故) 강암 송성용 선생 약력

1913년 김제군 백산면에서 출생
1956년 제5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입선, 이후 특선
1964년 첫 개인전 개최(전주)
1966년 문교부장관상 수상
1981년 대만국립박물관 초대전
1992년 강암서예학술재단 창립
1995년 강암서예관 개관, 동아일보 초대 강암회고전 개최
1999년 자택에서 별세

<기획취재팀>
한성천(팀장)·김미진·송민애·장태엽 기자

송민애기자 say2381@domin.co.kr

출처 : 전북도민일보(http://www.do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