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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시민의신문 20010821] <김제의 인물>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

작성자
강암서예관
작성일
2001-08-21 19:01
조회
299
출처 : http://www.gj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11

 

서예의 대가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

당대 최고의 한학자이자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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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암 송성용 선생이 지난 1999년 2월8일 전주시 완산구 교동 자택에서 타계했을 때 그의 나이 향년 86세였다. 기호삼남을 둘러봐도 참된 선비를 찾기 어려운 세태에 강암 선생은 기개가 우뚝한 드문 선비요 한학자요 서예가였다.


가문의 맥을 이어 일찍부터 학문과 시서화를 두루 섭렵한 강암 선생은 구양순·미원장 등 당송의 대가들을 두루 연마했던 선비의 타계는 우리 예술사의 한 획을 긋는 일이었다.


-백산면 상정리에서 출생-


강암은 한국 서단의 최고봉으로 평생을 유학·한문학·서예에 정진했고, 사군자 등 문인화에 일가를 이루었다. 특히 그는 구체신용사상(舊體新用思想)을 펼쳐 고법의 전통을 현대적 조형미로 육화시킨 「강암체」를 일궈냈다. 1992년에는 강암서예학술재단을 창립했으며 1995년 강암서예관을 개관했다.


그후 이를 바탕으로 선생 나름의 독특한 경지를 개척한 이른바 강암체를 완성했다. 평생동안 상투 틀고 갓과 흰 한복을 놓지 않았던 선생은 또 명리와 감투를 멀리해 일생 재야 학자로 일관했다. 후학들의 강권으로 한 때 국전 심사위원직을 맡았지만 끝내 상경하지 않고 향리에서 작품을 심사한 고집은 유명한 일화다.


그러나 강암의 진면목은 바로 강암서예관 건립 기증에서 나타난다. 소싯적 어렵게 성장한 선생은 평생의 가보라 할 우암, 단원, 만해, 운미, 백범선생의 서화 등과 선생의 작품 등 1백여 점의 값진 소장품들을 선뜻 전주시에 기증했다. 학문의 집안이 대저 그렇듯이 선생의 가문도 두루 묵향이 배어 있다.


1913년 백산면 상정리에서 유재 송기면(裕齋 宋基冕)선생의 3남으로 태어난 강암은 호남 유수의 서예 대가였던 운재 윤제술 선생과 동향이자 처남매부간이다. 선친 유재 송기면선생 또한 한말 성리학의 대가 간재 전우선생의 제자로 학문이 깊었다.


-선친 송기면 선생이 스승-


선친인 유재는 간재(艮齋) 전우(田愚) 문하에서 공부한 유학자다. 유재는 특히 문장과 서법에 익숙하여 훗날 강암 서예의 전범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유재는 후에 고향인 김제에 돌아와 은거해 「요교정사」라는 강학소를 차리고 제자들을 불러모아 가르쳤다. 유재는 한편으로 같은 마을에 살았던 석정 이정직의 사상과 학문도 익혔다. 석정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양철학인 칸트의 사상을 받아들였다고 전하는 빼어난 학자이다


어렸을적부터 몸이 약했던 강암은 여섯살이 되던 해부터 이곳 요교정사에서 어린 학동들과 함께 천자문을 읽기 시작해 한학을 깨쳤다.


열여섯살되던 해에는 결혼을 해 분가하여 살림을 차렸다. 강암의 아내 이도남은 역시 선친 유재와 함께 간재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완주출신의 유학자 고재 이병은의 셋째 딸이었다.


결혼후 강암은 장인 고재로부터 학문과 서도를 사사했다. 그는 선친과 장인으로부터 받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그위에서 격조 높은 서도의 경지를 세웠던 것이다.


-사군자에 눈을 뜨다-


스물다섯살때부터는 사군자에 눈을 떴다. 당시 매화와 죽을 잘 그려 당대의 문인화가로 꼽혔던 김용진으로부터 사군자의 필법을 받았으며 김진우를 찾아가 서죽법(書竹法)강론을 듣기도 했다. 그의 학문과 서예 연마를 향한 열정은 중단되지 않았다. 정읍과 부안 개암사 장성 등지의 학문도량은 그가 당시 찾아다녔던 곳이다. 6·25 직후부터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6년 그는 주위의 권유로 대한민국 제5회 미술전람회에 행서와 묵죽을 출품해 입선했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그의 솜씨가 단순한 서학도의 솜씨가 아니라 어떤 파벌과도 연줄이 없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66년에는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으며 1970년대에는 자신이 출품했던 국전의 심사위원을 역임하는 등 서단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강암은 한편으로 유학의 도를 세우는 데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1960년에는 성균관 사성으로 피선되었으며 이후 유도회전북본부 위원장과 성균관 전학을 차례로 거쳤고 간재학회(艮齋學會) 회장직을 맡아 유학의 전통과 학맥을 이어가는 일에도 열정을 쏟았다.


강암의 서예는 1965년 전주시 완산구 교동으로 이주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국전특선과 문교부장관상 수상이 이어졌던 67년에는 문하생들을 중심으로 연묵회를 조직, 전북 서예의 틀을 만들어냈다. 연묵회는 오늘의 한국서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수많은 서예가들이 활동하는 단체가 되었다.


강암의 서예는 서예의 오체가 두루 고전에 의거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초년에 구양순첩에서 해서(楷書)를 익혔으며 동기창(董其昌)에서는 행서를, 한예의 금석탁본으로는 예서를 배웠다. 중년이후에는 안진경을 비롯한 청대 대가를 두루 거쳤다. 추사의 운필법 또한 섭렵했다. 서죽법(書竹法)으로는 정판교와 오창순의 죽법을 깨쳤다.


-고전의 현대화 이뤄-


오늘에 이른 강암의 서예는 고전의 현대화로 대변된다. 그의 서예는 「졸박한 멋과 극히 자연스러운 이미지, 칼날같은 강기가 아니라 바위를 닳게 하는 유수와 같은 리듬의 필력, 어떤 법식이나 자기류의 개성미에 매인 것도 아니고 정법에 머물면서도, 또한 정법에서 벗어나서도 속기의 자취를 찾을 수 없게한다」는 평을 받는다.


강암 송성용선생은 전북의 예술적 전통을 오늘에 까지 탄탄히 뿌리내리게 한 예술가다. 당대를 빛낸 서예가로서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로서 그에 붙여지는 찬사는 각별하다.


슬하의 4남2녀도 각계에서 활동이 대단하다. 장남 하철씨(전 전주시장·전 부지사), 차남 하경씨(서예가·성균관대 교수), 3남 하춘씨(소설가·고려대 교수), 4남 하진씨(행자부 민간협력과장) 등이 각계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2녀 현숙씨도 서예가로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이 글은 전북일보의 「전북인물 50인」과 「고향의 인물」(1989)을 참고하였습니다.


김익현 기자 desk@kimjenews.co.kr




※강암 송성용은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 다섯가지 글씨체에 능하고 사군자 매화,난초,국화, 대나무에 능한 이 시대의 거목이었다.


※그는 독특한 자신의 강암체를 완성한 개척자이기도 하다.


<강암선생 약력>

▲ 1913년 김제군 백산면에서 출생

▲ 제5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부터 입선과 특선

▲ 1964년 전주에서 첫 개인전

▲ 1981년 대만 국립박물관 초대전

▲ 1992년 강암서예학술재단 창립

▲ 1995년 강암서예관 개관, 동아일보 초대 강암회고전 개최

▲ 전라북도미술전람회 심사위원장,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동아미술제 심사위원, 서울 예술의 전당 자문위원,

간재사상연구회장 역임

▲ 전북문화상, 대한민국문화훈장 수상

▲ 1999년 2월8일 전주시 자택에서 타계



<강암서예관>


강암 송성용 선생의 서예 작품 200여 점과 추사 김정희, 창암 이삼만, 단원 김홍도의 작품과 다산 정약용의 간찰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전 화 (063)285-7442

주 소 전북 전주시 교동 2가 197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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